허튼소리2008/01/04 01:41

[2004년 5월 21일 작성]


[TB - 내마음을 움직인 책]에 대한 트랙백입니다.


마음을 움직인 책이라면 읽고서 감동을 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저의 생각이나 삶에 영향을 준 작품을 말하는 듯합니다. 둘 중 하나라면 고르기가 수월했을텐데 둘 다 만족하는 책을 택하자니 한참동안 기억의 창고를 뒤적거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떠올린 작품은 바로 솔제니친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입니다.


구 소련 스탈린의 철권통치 시절 한 반역자 수용소가 무대이고, 주인공인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가 잠에서 깨어 다시 잠에 들기까지의 하루 일과를 그려낸 작품이지요. 워낙 유명한 책이니 많이들 읽으셨으리라 여겨지지만 간단하게 스토리를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인공 슈호프는 독소전쟁에서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탈주하였으나 밀정으로 몰려서 반역자 수용소에 수감된 인물입니다. 전직은 평범한 농부지요. 그는 어느날 잠에서 깨어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다른 날과 달리 자리에서 미적거리다가 간수에게 걸려들고, 간수들의 사무실을 청소하는 벌을 받게 됩니다. 이 일로 그의 아침 일과가 약간 차질이 생깁니다. 담배를 사지 못하고, 병원에서 진찰을 받아 노동 면제를 받겠다는 계획도 어긋나며, 식어빠진 국을 먹고, 식후의 짧은 휴식도 취하지 못합니다.


이윽고 죄수들은 영하 30도라는 매서운 추운 날씨임에도 강제 노역에 나가게 됩니다. 그들의 작업장은 수용소 밖에 건설 중인 발전소, 슈호프가 속한 104반은 발전 센터 건물에 벽돌을 쌓는 일을 담당하게 되고, 공사가 중단되었던 곳이라 오전 내내 작업을 위한 준비를 하며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점심 시간에 슈호프는 배급계를 속여서 죽을 한 그릇 더 얻어먹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벽을 쌓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슈호프는 솜씨가 좋은 벽돌공이어서 작업의 중추적 역할을 맡습니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고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는 성격이라 최선을 다해 벽돌을 쌓기 시작합니다. 자기의 신세도 잊고, 그저 일을 하는 즐거움에 빠져서 신바람나게 일을 해나갑니다.


노역을 마치고 지루한 인원 점검에 시간을 허비하고 죄수들은 다시 수용소로 돌아옵니다. 슈호프는 여전히 바쁩니다. 외부의 가족들이 죄수에게 보내오는 소포를 수령하는 줄에 서는데, 자기 소포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죄수 대신 미리 자리를 잡아주려는 것입니다. 그 대가는 소포를 받은 죄수 몫의 저녁 식사입니다. 소포에 먹을 것이 들어있으므로 받은 사람은 수용소의 저녁이 필요없는 것이지요. 슈호프는 이인분의 저녁 식사를 즐기고, 아침에 사지 못했던 담배도 사서 맛있게 피웁니다. 무거웠던 몸은 이미 개운해졌으므로 병원에 갈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소포를 받은 동료 죄수에게서 소시지와 크래커를 받아 맛보는 기쁨도 느껴봅니다.

점호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 슈호프는 오늘 하루는 재수가 매우 좋은 날이었다고 만족해합니다. 아침에 늦장을 부리다 걸렸지만 영창에 가지 않았고, 점심도 곱배기로 먹었고, 오후엔 신나게 벽돌을 쌓았고, 대신 순번을 기다려준 덕도 보았고, 담배도 샀고, 몸 상태도 거뜬해졌으니 우울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의 행복하기까지 한 하루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에는 주인공 슈호프 이외에도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담배 꽁초를 줍고 남이 다 먹은 그릇에 남아있는 음식을 핥아먹는 페츄코프, 종교적 믿음으로 시련을 감내하는 침례교도 알료샤, 해군의 함장이었던 시절의 기백을 잃지 않고 있는 부이노프스키, 부유한 가족 덕분에 많은 소포를 받고 그것으로 뇌물을 뿌려 안락함을 꾀하는 전직 영화감독 체자리, 104반의 반장으로 반원들을 위해 책임을 다하는 노련한 인물 추린, 이들의 하루는 슈호프의 하루와 다를 바가 없겠지요. 오직 생존이 목표입니다. 그 생존하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작가는 담담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수용소의 하루를 묘사합니다. 무서운 추위와 형편없는 식사와 비인간적인 대우,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 생존하고 있는 죄수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감정의 과잉도 없고 과장된 표현이 없기에 그들의 모습은 더욱 사실적입니다. 작가는 슈호프의 하루가 재수 좋은 날이었다고 말했지만 독자에겐 결코 그렇게 느껴질 수가 없겠지요.



참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냐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존엄은 어떻게 지켜지는가, 자유로운 삶의 가치, 행복이라는 것의 조건, 타인과의 관계, 마지막 자존심마저 버린다면 인간은 어떤 모습이 되는가, 인간은 얼마나 나약하며 또 얼마나 강한 존재인가, 희망은 무엇이고 절망이란 또 무엇인가 등등이 꼬리를 물었던 자국이 누렇게 변색된 종이에 적혀서 책갈피에 꽃혀 있습니다.


삼십년 정도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해답은 찾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렴풋이 알듯한 것도 있고, 나름대로 정의를 내린 것도 있으며, 지키고자 노력한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들은 하나의 과제로 남아있으며, 또한 남겨져야만 하는 것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네요.



이 위대한 작품에는 인상적인 대목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 포스트를 쓰기 위해서 다시 한번 읽었는데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슈호프가 이인분의 저녁을 먹으며 만족하는 대목에 잠깐 삽화처럼 등장하는 인물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오래 수용소 생활을 했는지도 모를 정도라고 알려진 전설적인 노인과 마주앉게 됩니다. 머리도 모두 빠지고 이도 하나도 없는 노인입니다. 그러나 이 노인은 언제나 등을 쭉 펴고 있으며, 단정하게 식사를 하고, 사무나 경노동 같은 혜택을 바라지도 않으며, 조금도 굴하지 않고 어떤 종류의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슈호프는 노인을 바라보며 묘사를 할 뿐 어떤 감상도 내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웅변하고 있습니다. 나의 존엄은 바로 내가 지키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이 웅변을 어린 나이에는 들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 장면을 찾은 것이 이번 트랙백 놀이에 참여한 가장 가치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통스럽게 읽자면 한없이 고통스럽고, 재미있게 읽자면 또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혹시 아직 읽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일독을 권해봅니다. 특히 현재 누리는 삶이 고통스럽다고 여기거나 지루하다고 느끼는 분들에게 어쩌면 삶을 대하는 자세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지루한 글 맺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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