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튼소리2008/01/04 11:16

[2007년 1월 16일 작성]


헬스 클럽에 들어서며 보니 카운터 앞에 있는 테이블에 너댓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 하나가 자리를 잡고 앉아서 TV에서 방영하는 만화 삼매경에 푹 빠져있더군요.
누군가 아이를 데리고 운동하러 왔나보다 정도로 대수롭지않게 생각하고 지나쳤습니다.
평소 하던대로 자전거 페달 십분 돌려서 워밍업하고, 스트레칭으로 몸풀고, 벤치 프레스하러 갔지요.

만화보던 아이가 일어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이 얼핏 눈에 들어왔습니다.
벤치에 드러누워 역기 붙들고 자세 취하다가 왠지 좀 불안한 느낌이 들기에 고개만 빼꼼 쳐들어서 아이의 동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얘가 제 쪽을 향해서 뒤뚱거리며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어요.
그 애와 저 사이엔 한 청년이 역기들고 열심히 팔운동을 하고 있었고요.
감이 안좋아서 역기를 들어올리지 않고 그냥 붙잡은 상태로 대기했습니다.

아이가 어딘가에 발부리가 걸렸는지 비틀하더니 팔운동하던 청년의 다리에 부딛치면서 자빠지고,
청년은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하더니 역기를 든채로 곧장 제 쪽으로 넘어지려고 하더군요.
무의식적인 동작으로 발딱 일어서며 청년의 역기를 붙잡고 함께 중심을 잡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둘 다 무사했습니다.

저도 역기를 들어올리는 자세였다면 자칫 대형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하데요.
미안하다, 안다쳤냐, 괜찮다 등등 수작을 하면서 사내애는 무사한지 바라보았습니다.
이 녀석이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채로 우리를 멀뚱멀뚱 쳐다보더니만, 갑자기 통곡을 시작하네요.
어디 다친 것 같지는 않았으니 아마도 제딴엔 미안스러웠거나 혼날까 겁이 났나봅니다.
그 넘 목청 한번 우렁차더군요.

그 찰나 어디선가 애 엄마가 바람처럼 나타났습니다.
애를 달래니 이 녀석이 금방 울음을 뚝 그칩니다. 역시 어디가 아파서 운 건 아니었습니다.
저는 상황이 종료된 것으로 알고 다시 벤치에 앉았는데,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 엄마가 청년에게 막 뭐라고 다그치는 것이었습니다.
무거운 거 들면서 조심을 해야지 어쩌구, 애가 가까이 오면 뭐 어쩌구저쩌구...

나 원 참! 기가 차는 노릇이었습니다.
청년은 어이가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착해빠진 성격이라 그런지 대꾸도 못하고 쩔쩔매네요.
보다보니 성질이 나길래, 결국 못참고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정신을 집중해서 운동할 때에는 주위를 살피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는 법이니 이 청년은 아무 잘못이 없고, 아이는 원래 뭐가 위험한지 판단을 잘 못하는 법이니 아이도 잘못한 건 아니고,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자기 자식이 위험한 곳에 돌아다니는 것을 단속못한 애 엄마가 아닐까 하오만'
말 마치자마자 곧바로 이어폰 귀에 꽂고 벤치에 그냥 드러누워버렸습니다.

애 엄마가 뭐라고 말대꾸하면 싸움이 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고, 아줌마랑 싸우면 승패를 떠나서 저만 손해잖아요.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의미를 강력히 전달하는 것이 최선...
역기 붙들고 가자미눈을 뜨고 슬쩍 엿보니 다행스럽게도 애 엄마가 아들넘 데리고 그냥 물러서더군요.
청년이 꾸벅 절을 하길래 씩 웃어주고 힘차게 역기 번쩍 쳐들었습니다. 이로써 상황 진짜 종료.

각종 쇳덩어리며 위험스런 물건이 널려있는 헬스 클럽에 천방지축인 어린애는 절대 데리고 오지 않아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운동을 꼭 해야만 하는 절실한 이유가 있는데 애 봐줄 사람이 없었다거나 등등의 사정이야 있었겠으나, 웬만하면 하루 운동 쉬는 것이 좋겠죠.
꼭 운동을 해야만 한다면 애를 어디다 묶어놓아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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