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 한문2010/06/20 17:48
허정무 감독이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 '파부침주의 각오로 임하겠다'고 말했다지요. 보통 '파부침선(破釜沈船)'이 더 많이 쓰이기는 하지만, 파부침선이나 파부침주나 흔한 고사는 아니지요. 글자대로 해석을 하면 '솥을 깨고 배를 가라앉힌다'가 되는데, 고사가 대개 그렇듯이 이것도 유래를 알면 뜻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전은 사마천(司馬遷)의 역작 사기(史記)의 항우본기(項羽本紀)입니다.
항우는 아시다시피 초(楚)나라의 군주로, 진(秦)나라를 멸망시키고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중원을 놓고 자웅을 겨루던 인물이지요. 처음엔 승승장구하였으나 마지막 전투에서 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비록 중국을 통일하지는 못했지만 사마천은 그의 일대기를 본기(本紀)에 올려 황제와 같은 반열에 놓았습니다. 항우본기엔 훗날에 널리 쓰이게 되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되는 이야기들이 수두룩하게 들어있습니다. '파부침선'도 그 중 하나이고요.

진시황이 죽자 간신들이 득세하여 진(秦)의 나라꼴이 엉망이 됩니다. 진에 망한 나라의 후예들과 호족들이 각지에서 기회를 틈타 나라를 세우고 진나라에 반하는 기치를 올립니다. 비록 나라꼴이 개판이 되었다 해도 아직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는 진나라에서 이들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 진압군을 보냅니다. 반군 중 하나인 조(趙)나라는 진의 군대를 맞아 위기에 처하게 되자 각지에 구원군을 요청하고, 힘을 합하지 않으면 대항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있었는지 여러 제후국에서 구원병을 보내게 됩니다. 항우가 속한 초나라의 회왕(懷王)도 송의(宋義)라는 자를 상장군으로 삼고 항우를 차장(次將)으로 삼아 구원병을 파견합니다.

송의라는 자는 뇌물 받기 좋아하고 옹졸한 인물이었던 모양인데, 조나라가 위급한 상황인데도 진군을 서두르기는커녕 도중에 멈춰서 연회나 베풀며 놀고 있었습니다. 조나라 군사를 포위하고 있는 진군의 장수는 장한(章邯)이라는 인물인데, 고아인 항우를 키워준 숙부 항량(項梁)을 전투에서 죽인 전력이 있습니다. 숙부의 원수를 갚고자 독이 오른 항우가 잠자코 있을 수는 없었겠지요. 어서 진격하자고 채근을 하자 송의는 일단 둘이 먼저 싸워서 힘이 빠진 후에 공격할 것이니 나서서 까불지 말라고 야단을 칩니다. 항우는 조나라가 깨지면 적들은 더욱 승승장구할 것인데 뭔 개소리냐, 요렇게 생각하고는 송의의 목을 확 따버립니다. 그리고 송의가 알고보니 배반자였고 왕의 밀명을 받아 목을 베었다고 뻥을 치지요. 이 말을 믿었는지 아니면 무서워서 감히 대들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다들 승복을 했고, 항우는 스스로 상장군이 되어 군사들을 이끌고 황하(黃河)를 건너 거록(鉅鹿)에 포위된 조나라 군대를 구원하러 진격합니다.

황하를 건넌 후에, '파부침선'의 유래가 되는 대목이 나옵니다.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羽乃悉引兵渡河 皆沈船 破釜甑 燒廬舍 持三日糧 以示士卒必死 無一還心 (항우실인병도하 개침선 파부증 소려사 지삼일량 이시사졸필사무일환심"

해석을 해보자면 이렇습니다.
"항우는 병사를 모두 이끌고 황하를 건넜는데,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부수고 막사를 불태우고 삼일간 먹을 양식만 가지게 하여, 반드시 죽기로 싸울 것이며 돌아올 마음이 한점도 없다는 것을 사졸들에게 보였다."
'皆沈船 破釜甑' 여기서 넉 자를 따서 나온 것이 바로 '파부침선'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다' '훗날을 생각하지 않고 싸우다' 등등의 의미로 쓰이는 고사입니다.

전투의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요?
대단히 효과가 있었나봅니다. 당시에 거록성을 구원하려 각지에서 제후들이 몰려들었는데, 항우의 군대가 선봉에 서서 전투에 나섰답니다. 제후들은 진지에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항우의 군사들이 천지를 진동시키는 함성을 지르며 일당십의 용맹을 떨치자 겁이 나서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진나라 병사를 격파하고 항우가 진중에 떡 버티고 앉아서 제후들을 부르자 무릎 걸음으로 기어들어와서는 감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지도 못했다네요.

이 전투를 계기로 항우가 진나라에 대항하는 반군의 왕초가 되는 셈인데, 일단 '파부침선'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는 마쳤으니 그 훗날의 이야기들은 이만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지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의로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 나서는 허정무 감독. 그 결과가 어찌될지 궁금해지는 와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강한 결의를 다지는 것이 승부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으나, 스포츠가 전쟁도 아니고 축구는 즐기자고 하는 공놀이인데 조금 과한 결의가 아닐런지...

경기에 져서 예선에 탈락한다면 욕을 무척 많이 먹기야 하겠지만, 그게 얼마나 가겠습니까. 우리나라 국민들 뭐든 금방 잊어먹잖아요. 월드컵 끝나고 한달만 지나면 축구 얘기하는 사람 거의 없을걸요. 또다른 무엇이 인터넷과 언론을 달굴 것이고, 또다른 누군가가 욕을 퍼먹고 있을 것이고, 또다른 떡밥을 물고서 내가 옳다 네가 그르다 싸움박질을 하고 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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