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튼소리2008/01/04 11:05
[2006년 2월 14일 작성]

직장생활을 할 때의 일입니다.
발렌타인데이엔 마음씨 착한 여직원이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남자직원 모두에게 공평히 나눠주는 초콜릿을 받아먹는 것이 불쌍한 솔로들의 처지였습니다. 애인이나 안사람에게서 택배로 초콜릿을 받은 직원이 자랑스럽게 나눠주는 것도 받아먹었고요. 그 해의 발렌타인데이도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근무를 시작하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뭔가 꺼내려고 책상 서랍을 열었습니다. 반짝거리는 종이로 곱게 포장하고 조그마한 리본까지 달린 괴물체가 들어있었습니다. 초콜릿이라는 것을 직감했지요. 왠지 그자리에서 포장을 벗기면 안될 듯하여 얼른 양복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담배피우러 나가는 척하며 사무실에서 나와 으슥한 곳으로 갔습니다.

초콜릿이 맞기는 한데 그 모양새가 참 심난하게 생겼더군요. 하트 모양이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 야릇한 것은 단지 초콜릿만 들어있을 뿐, 쪽지나 카드 등 누가 어떤 이유로 주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포장지도 뒤집어보고, 초콜릿갑도 구석구석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다시 대충 싸서 안주머니에 간수하고, 담배 한 개비 물었습니다.

누구의 소행인지 무지막지하게 궁금하더군요. 일단 같은 부서에 근무하던 여성들은 전부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저보다 일찍 출근한 사람이 없었거든요. 다들 근무시간 시작 직전에 도착하는 땡순양들 뿐이었어요. 전날 저녁에도 다들 저보다 일찍 퇴근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 서랍에 초콜릿을 넣어둘만한 여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전 회사의 여직원을 수사 대상에 올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막했습니다. 여직원 수도 꽤나 많았던데다가 한눈팔지않고 일만 열심히 하던 저였으므로(믿거나 말거나;;) 누군가가 제게 관심이 있다고 해도 알 수가 없었던 상태였답니다. 업무상 알고 지내는 몇몇 여직원들, 대학 동문 몇몇을 머리에 떠올려봤지만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없다고 보였습니다.

누구냐는 의문은 접어두고 과연 의도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제게 마음이 있는 것이라면 왜 자기가 누군지를 밝히지 않았을까요? 부끄러워서일까요? 그럴듯한 생각이긴 했습니다만 어쩐지 석연치않았습니다. 밝히지 않으면 초콜릿을 주는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답을 모르는 의문으로 머리를 썩여봐야 골치만 아파지는 법이지요. 그래서 고민을 접기로 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서른살이 훌쩍 넘은 노총각 사원에게 잠시나마 가슴 설레는 기분을 맛보여주려는 어떤 천사같은 마음씨를 가진 처자의 선행이 아닐까하는... 뭐 아무려면 어떻겠습니까.

아무튼 덕분에 하루 내내 기분이 좋았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도 안주머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거나, 셔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다가 손끝이 닿으면 슬며시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날 이후에도 사나흘 동안 잠깐잠깐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지나쳐가며 건네는 인사가 좀 더 명랑하면 혹시나 하는 생각이 얼핏 스치기도 했습니다.

누구의 선행이었는지는 아직도 미지수로 남아있습니다. 언젠가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고요. 또한 이 글을 그 누군가가 읽으리라는 가능성도 거의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남겨두고 싶습니다. 기분 좋은 순간과 기억을 남겨준 것에 대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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