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 26일 작성]
국어 사전을 찾아보면 '비장미(悲壯美)'라는 낱말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장한 데서 느껴지는 아름다움"
흠.. '비장(悲壯)'이라는 낱말의 뜻을 모르면 말짱 헛것이네요. 본래 사전이라는 것이 한번에 만족스런 결과를 보여주지는 않는 법이죠. 그러면 이제 '비장'을 찾아봐야 겠는데, 이번엔 머리를 좀 써서, '비장하다'을 찾기로 하겠습니다. '하다'가 붙어서 동사가 되는 낱말은 어근에는 풀이가 베풀어지지 않는 것이 보통이거든요. '~~의 어근.' 요렇게 풀이한 사전이 많아요. 아무튼 '비장하다'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풀이를 해놓았군요.
"슬프고도 장하다. 슬픔 속에서도 의기를 잃지 않고 꿋꿋하다."
그렇다면 '비장미'의 뜻은 "슬프고도 장한 데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슬프기도 하면서 장하기도 한 느낌이 주는 아름다움'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문득 한가지 의문을 품어봅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소설이나 영화, 연극 등에 나오는 장면 중에서 '비장미'가 가장 뛰어난 대목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입니다. 슬프면서도 장한 느낌이라.. 가물가물, 떠오를 듯하면서도 막막합니다.
슬픔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별'이 가장 먼저 연상됩니다. 죽어서 이별하는 사별(死別)이든 산채로 갈라지는 생별(生別)이든, 헤어짐은 슬프게 마련입니다. 이별하는 것 말고 또 어떤 때 슬픔을 느끼게 되나요? 실패했을 때는 아무래도 낙담이나 좌절이라는 감정이 우선일 듯하고, 따돌림을 당한다면 분노나 고독이 섞여들 듯하네요. 역시 슬픔을 일으키는 원인은 '이별'이 최고인 듯합니다.
그럼 장한 느낌이 드는 이별 장면을 생각하면 '비장미'가 넘치는 대목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연인들의 이별은 장한 느낌을 겸하기엔 좀 힘들 것이고, 죽음도 이별인 것은 틀림없으니 장하게 죽는 장면이라면 '비장미'를 찾을 수 있겠네요. '장한 죽음'하니 한국인답게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시는 장면이 퍼뜩 떠오릅니다. 그런데 아름답다는 느낌은 많이 들지가 않네요. 장한 일을 하기위해 이별을 하고 떠나가는 장면이라면 어떨까요.
사마천의 사기 열전 자객편에 등장하는 형가(荊軻)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때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 볼모로 잡혀있던 진(秦)나라에서 탈출하여 고국으로 돌아온 연(燕)나라의 태자 단(丹)은 진나라의 침략에서 연나라를 구하는 방법은 진왕 영정(嬴政, 후의 진시황)을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객을 물색합니다. 이에 추천을 받은 사람이 바로 형가, 그는 진왕을 암살하려면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야하고 그러자면 두가지 물건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연나라의 곡창지대인 독항(督亢)의 지도이고, 남은 하나는 진나라를 배반하고 연으로 망명해온 장수 번오기(樊於期)의 목. 태자 단은 지도는 가능하지만 자기를 믿고 의지하여 찾아온 사람의 목을 벨 수는 없다고 난색을 표합니다. 형가는 직접 번오기를 찾아가 설득을 하고, 형가의 이야기를 들은 번오기는 쾌히 응낙하고 자기 손으로 목을 찔러 자결합니다. 황금 천근의 현상금이 붙은 번오기의 목과 둘둘 말아서 독이 묻은 비수를 감춘 독항의 지도를 가지고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형가...
드디어 비장미 넘치는 대목이 나옵니다.
태자 단을 비롯한 지인들이 흰 상복을 입고서 배웅하러 나옵니다. 역수(易水)가에 이르러 이별의 시간이 되자 형가의 가장 친한 벗 고점리(高漸離)는 자신의 장기인 축(筑)이라는 악기를 타며 벗과 헤어지는 슬픔을 나타냅니다. 모인 사람들은 서글피 울고, 형가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노래 한 구절을 지어 부릅니다.
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 (풍소소혜역수한, 장사일거혜불부환)
바람은 쓸쓸하도다, 역수는 차디차고
장부가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성공하든 실패하든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길을 떠나는 사내, 그를 보내는 사람은 미안함과 죄책감과 존경심이 섞인 서글픔으로 눈물을 자아내고, 한편으로는 약소국에 태어난 비애도 느끼겠지요. 명인이 마음을 담아 연주하는 가락이 울리고, 차가운 바람이 소슬하니 불어오고,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장사는 노래 한자락을 남기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져가고.. 이 정도면 슬프고도 장한 느낌이 드는 아름다움 맞지요?
여러분들께서 추천하는 비장미 넘치는 장면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알려주시면 감사하지요!
그건 그렇고, 형가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그는 무사히 진나라에 들어가 왕을 배알하게 됩니다. 두루마리 지도를 펼치자 감추었던 비수가 나타났고, 형가는 재빨리 비수를 잡고 진왕을 찔렀으나 소매만 북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진왕은 황급히 몸을 피하며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으려고 하는데 길이가 하도 길어서 검집에서 빠지지를 않습니다. 당시 진나라의 법은 어전에서는 아무도 무장을 할 수 없도록 되어있었고, 함부로 왕에게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답니다. 게다가 졸지에 벌어진 일이기도 하니, 측근 신하들은 우왕좌왕할 뿐이었습니다. 형가는 계속 왕을 쫓고, 왕은 도망가며 칼을 빼려고 애를 쓰는데, 신하 하나가 '검을 업으십시오, 업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왕은 검집을 등에 지고 드디어 검을 뽑아 들었습니다. 비수와 장검의 대결이니 결과는 뻔하죠. 왕은 형가의 다리를 베고, 형가는 마지막 힘을 다해 비수를 던지지만 빗나가서 기둥에 박히고 맙니다. 왕은 몇 번 더 칼질을 하고, 형가는 기둥에 기대 앉아서 진왕을 한차례 꾸짖어 준 후 최후를 맞습니다.
비장미, 슬프면서도 장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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