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튼소리2008/01/04 01:57

[2005년 6월 13일 작성]


세시 좀 넘은 시간에 잠시 걷기 운동이라도 할 마음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늦은 산책이 좋은 것은 길거리에 사람이며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등등이 없어서 이런저런 잡념에 빠져 터벅터벅 돌아다녀도 뭔가에 부딪치거나 받힐 걱정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야말로 한적하고 한가롭지요.


늦은 시간이라도 거리는 꽤나 시끄럽기 마련이라 보통 주택가 골목을 요리조리 다니는데 오늘은 갑자기 목이 많이 말라서 음료수 생각이 간절하기에 큰길로 나섰습니다.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에 들어가서 갈증 해소하고 내친 김에 큰길 따라서 주욱 걸어가 보았습니다.


저만큼 앞에 기묘한 물체가 보이더군요. 몇 걸음 다가가서 살펴보니 술에 완전히 맛이 가버린 듯 보이는 한 쌍의 젊은 남녀였습니다. 건물의 입구라서 조금 어두운 곳이기는 했지만 가로등 불빛 덕분에 입은 옷의 색까지 구별이 가능할 정도였습니다. 남자는 건물 입구의 턱에 앉아서 다리는 앞으로 길게 뻗고 등은 뒷편 철제 셔터에 편안히 기댄 자세였습니다. 여자는 아예 남자의 허벅지를 베고 똑바로 드러누웠더군요. 좀 더 다가가니 안보는 것이 좋은 놈들까지 자세히 보입디다. 피자 라지 사이즈 크기의 토사물 덩어리가, 그것도 뭘로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반 정도 뭉개진 상태로, 남자의 왼편 종아리 근처에 자리잡고 있더군요. 게다가 여자의 진분홍빛 티셔츠에도, 남자의 청바지에도, 심지어 곱슬곱슬 볶은 여자의 머리카락에도 토사물 자국이...(아침부터 죄송해요;;)

상황을 추리해보건대, 어디선가 마구 퍼마신 다음에 어딘가의 목적지를 향해 가다가 생리적 현상을 참지 못하여 그나마 좀 어두운 곳을 골라 먹은 것을 확인하고, 다리도 풀리고 취기는 더욱 치받아 올라와 그 자리에서 비틀거리다가 건물 입구에 주저 앉았고, 여자는 더욱 힘들어서 드러누웠고, 앉고 누운 김에 정신을 놓아버린 것이겠지요. 둘의 자세나 상황으로 보아 그냥 두면 계속 편안히 주무실 듯했습니다.


잠깐동안이나마, 흔들어 깨워서 집에 가라고 그럴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금방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예전에 길바닥에 드러누운 취객을 깨워주다가 봉변당하는 경험을 한 이후로는 날씨가 얼어 죽을 정도로 쌀쌀하지 않으면 건드리지 않기로 했거든요. 술취한 개라고들 하잖아요..


집으로 돌아와 새벽 서핑을 하며 놀고 있는데 문득 '공포의 몰카'라는 말이 머리를 스칩니다. 버스까지 다니는 큰길인데다가 우리 동네는 대학가거든요. 게다가 그 길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등교길이기도 하다는 말씀입니다. 디카나 폰카를 휴대한 사람들의 숫자가 엄청나다는 것, 그리고 이 시대의 청춘들 중 엽기 사진 찍는 재미에 물불 안가리는 친구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으리라는 생각. 잘못하다가는 술 취해서 뻗은 실수로 말미암아 전국적인 개망신을 당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머리를 쳐듭니다. 더불어 그들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좋았겠다는 후회도 조금 일어납니다.

지금 시간, 이미 창밖은 환하게 밝았습니다. 일찍 등교하는 학생들이라면 벌써 그 자리를 지나가고도 남은 때입니다. 그들이 도촬의 제물이 되기 전에 누군가 마음씨 착한 사람의 덕을 입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기를 바랄 뿐입니다. 꼭두새벽부터 간밤의 지저분한 흔적을 지우느라 수고하시는 환경미화원 아저씨들이 계신데, 어쩌면 그 분들께 조금 욕을 먹고 개망신의 위험은 모면했으리라는 생각도 들기는 하네요.


디카니 폰카니 하는 물건들이 이 세상에 없던 시절에는 아무리 술을 왕창 퍼마시고 길바닥에 퍼져도 적어도 전국적인 개망신을 당할 걱정은 없었지요. 기껏해야 그 자리를 지나가는 행인들과 정신을 차린 후 안전한 장소로 대피하는 도중에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받는 것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요즘엔 어떤가요. 술에 취해 길에서 잠자는 것은 매우 크나큰 위험일 뿐더러, 아무리 피곤해도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고개를 쳐들고 한잠 자기에는 뒷골이 서늘할 지경입니다. 노상방뇨는 꿈도 꾸지 말아야겠고, 입을 한껏 벌리고 하품하는 것도 조심해야하고, 옷 솔기가 터졌다거나 지퍼가 고장난다면 어디선가 눌려지는 셔터가 있지는 않을지 신경써야하는 판국입니다. 이거 참 피곤한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명의 이기라는 것이 우리 생활을 편하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올바른 기능일텐데, 그게 불안감과 신경쇠약과 쓰잘데없는 눈치보기 등을 야기하는 흉악한 도구가 된다면 잘못되어도 많이 잘못된 것이겠지요. 허락없이 도촬을 한다거나, 본인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인물 사진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다거나하는 짓거리들을 철저하게 막을 시기가 된 듯합니다. 계몽도 해야겠고, 필요하다면 좀 더 강한 법규도 만들어야겠지요.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존엄성을 누리지 못함과 통하는 것이 아닐까요.


찍기만 하고 올리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모자이크를 하면 되지 않을까 따위의 생각은 맘에 안듭니다. 동의없이, 몰래 찍힌다는 것 부터가 기분 더럽고, 그것이 바로 사생활 침해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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